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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Jean Louis Poitevin

 

내면일기

 

 

내면 일기를 적어내려 가듯이, 그림을 그리는 것 혹은 데생을 하는 것은 유혜숙에게 있어서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일상적인 것들을 함축하는 구체적인 해답이요, 매일 필수적으로 얽혀있는 관계들에,웃음,분노,새로운 욕구 혹은 은밀한 계시 따위의 모든 움직임을 대비시키면서 이 관계들을 풀어헤치려는 대담한 방편이다.그런데 이러한 움직임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고 끊임없이 우리를 얽어 매면서 가끔 우리를 가두어 버리는 이 세계와 함께,사람들이 맺고있는 관계를 무리 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변화 시킬 수 있는 것들이다.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 그것은 시간을 요구하지만 데생을 하는 것은 순간적으로 되어질 수 있다. 연필과 종이가 바로 저기 손 닿는 거리에 있고 충동과 몸짓과 시간 사이에서 의혹의 어떤 무리들이 슬그머니 끼어 들 틈이란 없다.

 

그때 모든 것은 순간적으로 포착될 수 있다. 정신의 그물 망은 습관의 그물 망 만큼이나 펼쳐질 시간이 없다. 충동은 육체의 영역 밖에서야 겨우 그녀의 직갑들을 거둬드리도록 했다. 이 충동은 그날 그날이 제공하는 것을 보기 위한 것이며, 자유로운 땅을 발견하면서 매우 신속하게 그것을 소유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떻게 그녀가, 취향의 기준 즉 이것이 좋고 나쁘고 따위의 기준을 판단할 시간을 갖을 수 있겠는가? 마치 그녀에게 자유로운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음을 아는 것처럼 그때 그녀가 찾고자 하는 것은, 형체를 갖기 위해 슬며시 들어오는 그 어떤 것이다. 다른 형체에 직면해서 한 형체는 무엇을 만드는가?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즉 그녀는 그녀가 피하려고 했던 형체 자체에 충동을 놓은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정답은 그 형체들이 끊임없이 변화할지라도, 간단히 다음 말에 담겨있다. 즉 그것을 원하는 것 그리고나서는 적당한 시기, 우연, 상황, 그리고 그 순간의 굶주림에 관한 것이다.

 

유혜숙은 이들 데생 작업을 했을때 그녀의 몸무게를 좀 줄이려고 했다고 한다. 그것을 위해 먹는 것보다 오히려 데생을 선택했다고 하자. 이것은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데생하는 손은 볼 수 없던 의미심장한 사건을 짜기 위해서 이 모든 것에 혜택을 입는다. 그 손은 기쁨을 만들었고 이 형태를 매우 매력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게임을 창조했다. 

 

익은 과일의 싱싱함 부 터 마지막 속이 썩은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5개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사과, 우리 눈에 보기에는, 알지 못하는 혜성을 통과하려고 종이 우주를 건너가고 있는 키위, 그 자체로 은하수임을 드러내고 있는 쌀 알곡들, 찾기조차 힘든 윤곽을 가진 태양과 같은 감자, 모든 것이 여기서 특별한 포착의 시도를 불러일으킨다. 충동은 잠재된 힘과 그의 움직임 안에서 살아있는 것을 잡아낸다. 종이 위에 그려내는 것은, 삶을 가져오고 삶을 가져가는 우주와 같이 무한한 세계에서 그 충동이 대결한 삶의 빠른 속력 그 자체이다. 이 우주는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삼킬 준비가 돼있는, 보이지 않는 커다란 입과 같이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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